2024년 3월 26일 화요일

수발자본주의와

‘아 다르고 어 다른 세상에서’는 뜻하지 않은 원고청탁을 받고 쓴 것이었다. 매호 하나의 주제를 정해 다양한 필자들, 주로는 젊은 연구자들로부터 원고를 받는 잡지였다. 그 호의 주제는 ‘대학’이었다. 편집자님은 내가 블로그에다 써 올린 어떤 부주의한 글을 재밌게 읽으신 모양이었다. 교정공으로서 교수들의 한심스런 원고에 대해 한탄하며 쓴 얘기를... 잡지에 나 같은 사람의 잡문은 격에 맞지 않는 거 아닌가도 싶고, 노동 외 뭔가 원고를 써야 한다는 것이 또 다른 괴롬이기도 하고... 그러나 편집자님께도 나름의 공감과 결단이 있으셨겠거니... 나 자신의 부주의함에 대한 책임으로, 한편으로는 출판산업의 가려진 하청노동자로서 우리 웬수 같은 교수님들에 대해 성토할 공적인 기회가 왔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유수의 출판사로부터 지급되는 고료를 빨아먹을 기회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는 일념으로, 꾸역꾸역 썼다. 썼는데, 쓴다는 일이 늘 그렇지만 아무리 뭘 써도 불만족스럽기가 짝이 없고, 왜 더 낫게 쓰지 못했는지 후회가 남고, 뭐가 정리 정돈이 되기는커녕 내면 낼수록 더 내고 싶은 화만이, 더 쓰지 못한 아쉬움만이 남는 것이다. 나는 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다 하지 못한 얘기가 뭔가?

내가 못다 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지금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본다. 내 친구들은 지금 Y랜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거기 얘기는 잊을 만하면 나온다. 웃기는 데라는 거다. 모 지방도시에 있는 Y랜드... 나도 이야기에 끼어든다. 나는 거기 실제로 가봤다. 정말 재밌는... 콘텐츠가 많은 곳이다. 특히 외적 몰아내기 체험이 재밌었다. 심청이 체험도 진실로 기가 막혔는데... 없어지기 전에 다녀와야 할 곳으로 보여 다녀온 지가 벌써 6년이 지났고, 아직도 안 없어졌다는 게 대단하다. 따지자면 지나간 때의 유행이었을 Y랜드는 이제 진정한 밈으로, 웃음거리로 남았다. 안쓰러운 우리의 지방 도시들이 스스로 관광지화 외에는 활로가 없다고 여기는 상황에서 기획력과 집행력이 태부족한 상태로 어떻게든 돈 버는 용도로만 돈을 쓰려다 보니 그런 쓰레기-관광지가 자꾸만 만들어지고, 그런 실패작이 지나간 뒤 빈자리를 채우는 ‘검증된’ 유행들―물 있는 데마다 흔들다리, 산 있는 데마다 케이블카, 무작정 둘레길, 닥치고 데크, 이 악물고 축제, 눈물 나는 마스코트... 그런 것들이 꼭 복제되는 밈 모양으로 지방 구석구석을 채워 가는 모양새를 보고 있자면 너무 즐겁고 팔짝 뛰겠다. 왜 안 즐겁겠나? 유행을 읽어라! 더 이상 관광지에 아무 글자도 쓰지 말고 아무 뜻도 담지 마라! 관광객 모두의 손손마다 들린 스마트폰에 사진으로 남겨짐으로써, 그 구조물들은 그 자체로 글자가 되어야 한다. 이 또한 언젠가 웃음거리가 될 것인가? 이것은 마치 같은 것을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틀리고 마는 저자들 같고, 내 눈 사이로 빠져나가 인쇄되어 버린 오자들 같다. 이미 인쇄되어 버린 것들을 보며 나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다. 그냥 웃음이 저절로 나옵니다. 너무 좋죠. 나는 그것들을 더 온몸으로 만끽하고 싶다! 더! 더 만들어라! 더! 빼곡하게 채워라!

우리 대가리만 남은 좌파의 저작물들(존경과 감사, 안쓰러움을 담아)의 제목에도 돌고 도는 유행이 있다.
  1. ‘선언’ 앞에다가 땡땡 붙이기 → 욕심쟁이 스타일
  2. ‘사회주의’ 앞뒤에다가 땡땡 붙이기 → 세미나 스타일
  3. ‘공산주의’ 앞에다가 땡땡 붙이기 → 도발적인 스타일
  4. ‘자본주의’ 앞뒤에다가 땡땡 붙이기 → 조심스런 스타일
나 같은 필부도 못할 거 없으므로, 조심스럽게 ‘수발자본주의’를 제시해 본다. 어떨까? 모든 것에는 악몽 같은 버전이 있다. 수발자본주의는 이른바 돌봄선언의 악몽 같은(=현실의) 버전이다. 돌봄 대신 수발이다. 자본이 세계의 지배적인 동인인 한, 90% 인간의 삶은 그저 위쪽 10% 정도 인간의 수발을 들기 위한 것으로 격하된다. 자본이 그대로 힘 그 자체를 상징할 수 있는 세계에서 사회구조도 힘의 논리를 따라 상향 수발식으로 재편된다. 노동자가 자본가를, 남반구가 북반구를, 여성이 남성을, 약자가 강자를, 종들이, 여전히 양반들을 수발 들어야 한다는 식이다. 지방의 관광지화도 그 일환이다. 지방은 이제 그냥 수도권에서 관광하러 가는 곳일 뿐이다. 지방자치단체들은 관광부로 전락한다. 왜 관광하는가? 누가 관광하는가? 어떻게 관광하는가? 수발 드는 존재로 격하된 자신들을 잊기 위해서... 내가 그러했듯. 나는 그냥 평생 원청 수발 들어주는 사람이다. 원청은 교수 수발 들어주고... 노동이 쟁취한 권리들을 하나둘 무장해제시켜 온 과정을 거치며, 이제 산업은 원하청과 특수고용, 비정규직의 형태로 정렬되어 그 자체로 사회적 연쇄수발의 형상을 띠고 있다. 이제 경영활동이란 노동력을 뽑아내면서도 노동권을 우회하는 기발한 술수의 고안에 다름 아니게 되었고,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수발의 정점에 오르는 것이 곧 자유와 해방으로 취급받기에 이르렀다. 수발 그 자체인 산업에 발맞춰 수발 스트레스를 다루어줄 산업들, 나 대신 진정한 인생을 살아줄 영웅들을 우리는 찾아 헤맨다. 수많은 종류의 셀렙들이 인간의 이상으로 부상한다. 그들이 우리의 수발을 들어주는 듯이 우리가 그들의 수발을 들어주고... 기업 광고 부서의 수발을 들어주고... 조회수를 따라 기업으로부터 예산을 분배받고... 이건 문자 그대로 수발 중독이다. 우그러지는 중인 대의민주주의다. 착취를 넘어 착즙이다. 착즙이 아니라 복수가 필요하다. 수발이 아니라 돌봄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에겐 필요하다. 돌봄으로서의 복수, 복수로서의 돌봄이. 그것은 무엇인가? 심청이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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